야망을 품고 전력질주하는 오늘도 현재다

나는 꿈을 꾸며 살고 싶다.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살려고 해봤다, 요근래. 근데 못 해먹겠더라. 행복이 뭔지 모르는데 어떻게 하루를 행복하게 살겠는가. 정의가 없는 걸 추구하라는 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명령이다. 행복은 추구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에 몰입한 뒤에 사후적으로 인식되는 것 같다. “아, 그때 행복했구나”라고. 행복하겠다고 선언해서 작동하는 감정 따위는 없더라.

그래서 나는 야망을 품고 살련다.

이게 나를 가슴 뛰게 한다. 그게 가장 행복에 가깝다. 야망은 행복과 다르다. 대상이 명확하고, 거리가 측정 가능하고, 행위로 전환된다. “행복해져라”는 실행 불가능하지만 “이걸 이뤄라”는 실행 가능하다. 나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실행 가능성의 문제로 야망을 선택한 거다.

야망이 있는 자는 에너지가 넘친다. 정말 미친 사람처럼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고, 정말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는 사람. 그것이 나를 가슴 뛰게 한다.

모르겠다. 가슴이 뛰어서 꿈인 건지, 꿈이 나를 가슴 뛰게 하는 건지.

근데 이 질문을 뒤집어 보면 좀 무서운 게 보인다. 만약 가슴 뜀이 먼저라면, 야망은 그 에너지에 사후적으로 붙인 이름일 수 있다. 나에게 본질적인 건 “무엇을 이루겠다”는 내용이 아니라, 무언가를 향해 전력으로 달리는 상태 그 자체일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그랬다. 대상은 계속 바뀌었다. 그래도 가슴은 뛰었다. 그렇다면 야망의 대상은 교체 가능한 변수이고, 상수는 전력질주하는 상태 그 자체다.

무튼 나에게 있어서도 그렇고, 야망을 품은 사람들을 보고서도 그렇다. 야망은 가슴 뛴다. 타인의 야망에 공명하는 거다. 야망을 품은 사람을 봐서 야망이 생긴 게 아니다. 이미 안에 있던 걸 타인에게서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깨달은 게 하나 있다. 나는 “현재의 행복”에 실패한 게 아니었다. “고요한 만족”이라는 특정 형태에 실패한 거다. 야망을 품고 전력질주하는 오늘도 현재다. 다만 그 현재의 질감이 평온이 아니라 긴장이고, 충족이 아니라 갈망인 것이다. 나에게 맞는 현재의 형태가 정적인 행복이 아니라 동적인 열망이었던 것이다.

이 불꽃을 평생 유지하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가. 근데 불꽃은 연료가 필요하다. 야망의 연료가 결핍이면 채워지는 순간 꺼진다. 증명 욕구면 인정받는 순간 꺼진다. 호기심이면 세상이 존재하는 한 꺼지지 않는다. 내 연료가 뭔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나는 야망의 내용보다 야망을 품은 상태 자체가 좋다. 그렇다면 연료는 특정 목표가 아니라 전력질주하는 삶의 형태 그 자체다. 그게 맞다면, 이 불꽃은 생각보다 오래갈 수 있을 것 같다.

March 15,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