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 끝난 지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때가 떠오른다. 아마 내가 가장 온전히 몰입했던 시간이라 그런 듯하다.
5등급에서 시작해서 1년 반을 공부했다. 하루에 14시간씩 책상에 앉았는데, 괴롭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행복했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오늘을 충분히 살았다’는 감각이 있었고, 그게 다음 날 아침에 또 앉을 수 있게 해줬다. 목표가 하나였고, 해야 할 일도 하나였고, 앉아 있을 장소도 하나였다. 그 단순함이 몰입을 만들었던 것 같다.
그때 결심한 게 있다. 14시간을 해도 행복한 일을 찾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해서 그 충만함을 느끼며 살자…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 못 찾은 듯하다.
창업을 하면 될 줄 알았다. 어차피 14시간씩 일해야 하니까, 거기서 자연스럽게 몰입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창업은 공부가 아니었다. 코딩을 하다가 미팅을 하고, 미팅을 하다가 메시지에 답하고, 답을 하다가 하루가 끝난다. 정신없는 삶을 살고 싶었던 게 아니라 충만한 삶을 살고 싶었던 건데, 지금은 정신없기만 한 것 같다. ‘내가 원했던 삶은 이게 아닌데’라는 말이 자꾸 나오는 걸 보면, 어딘가 어긋나 있는 게 맞는 듯하다.
차이가 뭔지 생각해봤다.
수능은 나 혼자의 일이었다. 내가 통제할 수 있었다. 앉으면 됐고, 풀면 됐고, 틀리면 다시 풀면 됐다. 창업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서, 내가 아무리 앉아 있어도 상대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그 불확실성이 몰입을 깨는 것 같다. 그리고 수능 때는 과목은 여러 개였지만 하는 행위 자체는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기’라는 하나로 일관됐다. 지금은 열 가지 종류의 일을 하고, 종류가 달라질 때마다 머릿속이 리셋된다. 깊이 들어가기 전에 다음 일이 와버린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그리워하는 건 몰입 자체가 아니라 루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시간대에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시간에 끝내고, ‘오늘 잘 살았다’를 느끼며 잠드는 것. 수능이라는 수단이 그 루틴을 만들어줬다. 의지력으로 14시간을 버틴 게 아니었다. 루틴이 있었기 때문에 의지력처럼 보이는 게 나왔던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그 루틴을 온전히 내 힘으로 만들어야 한다. 시험이라는 외부 구조가 없으니까, 매일 아침 스스로 틀을 세워야 한다. 이번 BIG MONTH에 참여한 것도 루틴을 강제할 외부 장치가 필요해서였다. 그런데 솔직히 아직도 잘 안 되는 것 같다. 마음을 굳게 먹으면 며칠은 가는데, 예상 못 한 일이 하나 끼어들면 바로 무너진다.
한 가지 더 걸리는 게 있다. 루틴대로 살면 새로운 걸 못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여행도 가고 싶고,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싶고, 예상 못 한 기회에 뛰어들고도 싶다. 그런데 그러면 루틴은 깨진다. 루틴을 지키면 충만하고, 루틴을 깨면 자유롭다. 둘 다 포기하고 싶지 않은데, 이 둘이 생각보다 잘 양립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니, 사실 양립할 수 있는데 내겐 아직 그렇게 할 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March 31,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