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의 시대는 이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변화할 것이다. 이 말은 이미 진부하다. 모두가 하는 말이고,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말을 입으로 하는 것과 그 속도를 몸으로 체감하며 사는 것 사이에는 꽤 큰 간극이 있는 듯하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피곤한 세상이 될지도 모르고, 누군가에게는 박진감 넘치는 기회의 세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것의 존재가 점점 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 이미 그 과정이 생생히 보이기도 한다.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개념은 사실 인류 역사에서 꽤 짧은 기간 동안만 존재했던 예외적인 구조다. 20세기 중반, 대량생산 체제와 대기업 중심의 산업 구조가 자리를 잡으면서 “한 회사에 들어가서 수십 년간 일하고 퇴직금을 받고 나오는” 모델이 만들어졌다. 우리 부모 세대가 당연하게 여겼던 그 구조는 사실 특정한 기술적·경제적 조건이 맞아떨어져서 가능했던 것이지, 인류의 기본값이 아니었다.
그 조건이 지금 무너지고 있다. AI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빠르게 넓어지면서, 기업 입장에서 사람을 고용하는 이유 자체가 재검토되고 있다. 고객 상담, 문서 작성, 번역, 데이터 분석, 기초적인 코딩 이런 업무들은 이미 AI가 사람 이상의 품질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고, 기업은 당연히 비용이 적게 드는 쪽을 선택한다. 이건 악의가 아니라 경제적 합리성이다. 그리고 경제적 합리성은 감정으로 막을 수 없다.
없어지는 건 정확히 말하면 직업 전체가 아니다. 중간이 사라지고 있다. 중간 숙련도로 중간 임금을 받던 자리들, 주니어 수준에서 반복적으로 수행하던 업무들이 AI에 의해 압축되고 있고, 이 흐름은 되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남는 건 두 극단인데, 최종 판단을 내리는 시니어 전문가와 AI를 도구 삼아 혼자서 그에 준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소수의 개인이다. 그 사이에 있던 넓은 중간지대가 비어가고 있다.
이전 세대에게 “취업”이란 곧 “안정”이었다. 좋은 대학을 나와서 좋은 회사에 들어가면, 그 이후의 경로는 대체로 예측 가능했다. 승진하고, 연봉이 오르고, 집을 사고, 아이를 키우고, 퇴직한다. 이 경로가 성립했던 건 회사가 사람을 장기적으로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AI가 그 필요 자체를 줄여버리면, 경로의 출발점인 “취업”이라는 것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들어가더라도 얼마나 있을 수 있을지 모르고, 나오면 다시 들어갈 자리가 줄어들어 있다. 안정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직업에 붙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한편으로 AI는 창업의 도구적 장벽을 분명히 낮추었다. 혼자서 제품을 만들고, 페이지를 올리고, 카피를 쓸 수 있게 되었고, 직원을 뽑지 않아도 그 정도의 일손을 레버리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 크지 않은 리스크를 지고 본인의 일을 정의해나갈 수 있는 세상이 열린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에 불편한 진실이 하나 있다. 장벽이 낮아진 만큼 경쟁의 밀도도 함께 올라간다는 것이다. 모두가 같은 도구를 들면 차별화는 도구에서 나오지 않는다. 무엇을 만들지 결정하는 판단력, 누구에게 팔지 아는 유통 감각, 사람과의 신뢰와 커뮤니티 같은 것들은 AI로 자동화되지 않고, 시간이 걸리는 자산이다. 결국 창업은 민주화되었지만 창업의 성공은 민주화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창업을 실제로 해보면 안다. 0에서 시작해서 월급 수준의 돈을 벌어내는 일이 말도 안 되게 어렵다는 것을.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전부 이런 짓을 해야 한다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결국 도태되는 이들이 대량으로 발생할 것이고, 그 축을 기준으로 양극화는 더 심화될 수밖에 없다.
양극화가 심화된다는 것은 가난한 이들이 사회 전반에 많아진다는 말과 같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기존의 월급 구조, 이전 세대가 누렸던 안정적인 직장과 같은 것을 나라에, 정부에 요구하게 될 것이다. 역사를 보면 이 패턴은 거의 기계적으로 반복되어 왔다. 기술이 폭발적인 부를 만들고 그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면, 대중의 불만이 커지고 결국 정치적 격변으로 이어진다. AI 시대라고 이 구조가 달라질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자본주의를 붕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수가 눈에 띄게 많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구조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복지와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여기서부터가 진짜 어려운 지점이다.
복지의 근본적인 한계는, 돈은 줄 수 있지만 의미는 줄 수 없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분노하는 이유가 단순히 돈이 없어서라고 보면 문제의 절반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다. 돈이 없으면 물론 고통스럽다. 그러나 돈을 받아도 풀리지 않는 종류의 분노가 있다. 자기가 쓸모없다고 느낄 때 생기는 분노다. 내가 이 사회에서 아무런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는 감각,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감각. 그게 사람을 안에서부터 무너뜨린다.
실업수당이 있고 복지 프로그램이 돌아가고 있어도 사람들이 술과 약물에 빠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지는 건,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자기 자리가 사라졌다는 감각 때문이다. 경제적 빈곤이 아니라 존재론적 빈곤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기본소득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돈을 주면 고통은 줄어든다. 그러나 그 돈이 “네가 할 일이 없으니 사회가 먹여살려주는 것”이라는 신호를 인지하게 되면 그들은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감정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구조적으로는 복지 설계 자체에 ‘수혜자’라는 프레임이 내장되어 있어, 바닥은 깔리는데 계단은 놓이지 않게 된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존엄은 무언가를 받는 데서 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회적 효용에서 온다. 내가 이 세계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느낌,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느낌. 그게 없으면 물질적으로 아무리 안정되어 있어도 사람은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다. AI가 인간의 노동을 상당 부분 대체하면, 그 여유를 가지고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더 탐구하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진지하게 마주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인류 전반에 걸쳐 철학적 성숙이 이루어지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냐고.
이론적으로는 맞는 이야기다. 역사적으로 보면 “나는 누구인가”를 물을 여유가 있었던 인구는 언제나 극소수였고, 대부분의 인간은 생존 노동에 묶여 있었다. AI가 생존에 필요한 노동의 총량을 극적으로 줄인다면, 역사상 처음으로 대다수의 인간이 먹고사는 문제 너머의 질문과 마주하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는 이 낙관론에 동의하기 어렵다.
여유가 주어진다고 사람이 자동으로 자기 탐구에 들어가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은퇴 후 자유 시간이 넘쳐나는 사람들 중에서 그 시간을 자아 탐구에 쓰는 비율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여유는 탐구의 조건이지 탐구 자체가 아니다. 특히 2026년의 이 도파민 천지의 세상에서는 더욱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 자체가 자기 탐구와 정반대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고, 앞으로 더 그럴 것 이다. 알고리즘은 “나는 누구인가”를 묻기보단 “다음 15초 동안 뭘 볼 것인가”를 묻는다. 자기 탐구에는 한 가지 주제에 오래 머무르는 지속적인 주의가 필요한데, 현대의 정보 환경은 그 주의를 체계적으로 파편화하고 있다. 정보가 넘치면 넘칠수록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오히려 줄어든다.
고대 아테네에서 시민들이 철학적 탐구를 할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시간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광장이 있었고, 그 안에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었고, 연극과 민회와 배심 참여 같은 문화적 인프라가 자기 탐구를 촉발하고 지탱해주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그런 것이 있는가. 안타깝게도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인프라가 압도적으로 강하다, 더욱 강해지고 있다.
그래서 솔직하게 쓰자면, 나는 사회 전체가 이 기회를 기회로 만들어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본 시나리오는 절망 쪽에 가깝다고 본다.
AI가 중간 일자리를 압축하고, 정부가 복지로 경제적 바닥을 깔고, 그러나 의미의 공백은 채워지지 않고, 존재론적 빈곤이 더 넓은 인구층으로 퍼져나가는 시나리오. 기존의 복지 모델은 “일자리가 다시 생길 때까지 버티게 해주는 것”이라는 전제 위에 서 있는데, AI가 만드는 구조적 실업은 이 전제를 근본부터 깨뜨린다. 경기가 회복되어도 그 일자리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일시적 충격을 전제한 복지가 영구적 구조 변동과 만나면, 복지는 만성적 의존 구조로 전환되고, 만성적 의존은 결국 인류에게 절망을 초래할 것이라 생각한다.
국가는 돈을 줄 수 있고 제도를 만들 수 있지만, “네 존재가 의미 있다”는 감각을 제도로 설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 감각은 구체적인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인 프로젝트에 기여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에 생기는 것이지, 위에서 내려주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흐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사회 전체의 구조적 전환에 대해서는 비관적이다. 그러나 비관이 곧 무기력으로 이어지면 안된다. 사회 전체가 이 변화에 대비하지 못하더라도, 개인의 수준에서, 작은 공동체의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시키는 일을 잘 수행하는 능력이 아니라, 스스로 무엇이 가치 있는 일인지를 판단하고 그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의 일을 정의하는 것. 이건 기술이라기보다 태도이다. 작은 실험을 반복하고 실패를 겪고 방향을 조정하는 과정 속에서만 천천히 쌓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능해지려면, “기여”라는 것의 정의 자체가 넓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돈을 버는 것만이 아닌, 누군가를 돌보는 것, 가르치는 것, 만드는 것, 사람들을 모으는 것 시장에서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던 활동들도 충분히 의미 있는 역할이고, 그것을 역할로 인정하는 문화적 전환이 필요하다.
변화의 속도에 대한 체감을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변화가 빠르다는 걸 머리로 아는 것과 그 속도를 몸으로 느끼면서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변화를 인지하면서도 행동을 바꾸지 못하는 건, 게으름 때문도 있겠지만 공포라는 요소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움직이면 실패할 수 있고, 가만히 있으면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안전하니까. 그러나 그 안전이라는 층은 너무나 빠르게 얇아지고 있는게 현실이다.
이 글에 깔끔한 결론은 없다. 아마 이 주제에 대해 깔끔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이 시점에서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라는 질문의 무게도 함께 무거워진다는 것이다. 이전 세대는 그 질문을 반드시 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회사가 답을 줬고, 산업 구조가 경로를 깔아줬다. 우리 세대는 그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사회 전체가 이 전환을 해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 속에서 자기 자리를 직접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존재할 것이고, 그런 사람들의 수가 하나라도 더 늘어나는 것이 아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인 듯하다.
April 15, 2026